교회음악/찬양대

교회음악가 소개(박재훈 목사)

산애고 2022. 3. 17. 06:00

박재훈(朴在勳) 목사, 작곡가, 지휘자, 교수

 

박재훈(1922.11.4.2021.8.2.) 목사는 1922114일 강원도 금화군 금성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배화여고를 다니던 큰누나가 가장 먼저 예수를 믿고 부모를 전도해, 박 목사가 태어날 때쯤엔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있었다. 그는 모태신앙인이 됐다. 3명은 모두 감리회 목사가 됐다.

 

그는 평양요한학교에서 한국 교회음악의 개척자들인 장수철과 구두회를 만난다. 1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셋의 우정과 사랑은 평생 지속됐다. 이들은 일본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로 함께 유학을 떠났지만, 전쟁의 위협 속에 졸업하지 못하고 고국에 돌아온다. 일본 동경제국 고등음악학교 유학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려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다. 캘리포니아 패시픽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광고등학교 음악교사와 서울대, 한양대학을 비롯한 대학에서 음대교수로 제자들을 키우셨다.

 

해방 후에 쓴 동요는 어머니 은혜’, ‘엄마엄마 이리와’, ‘산골짝에 다람쥐’, 시냇물은 졸졸졸졸’, ‘송이송이 눈꽃송이’,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등은 현재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들어가 있고, '흰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교회 여름성경학교 주제가로 즐겨 부르는 어린이 찬송가가 있다.

찬송가에 실려 있는 그의 작품은 어서 돌아오오(317)’, ‘눈을 들어 하늘보라(256)’, ‘산마다 불이 탄다(311)’, ‘지금까지 지내온 것(460)’ 등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곡은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시편150)’,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주는 저산 밑에 백합및 교회오페라 에스더’, 수난곡 성 마가 수난음악’, 교성곡 뿌리 온 땅에 편만 하리등이 있으며 약 800여곡을 작곡 했다.

 

한국전쟁 후 영락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시작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1959년까지 맡았고, 1963년 돌아와 10년 더 봉사했다. 한국교회음악협회 활동도 하면서 어린이 찬송가크리스마스 노래 39곡집’, ‘박재훈 동요 작곡집’, ‘찬송가 합창곡집’, ‘주일학교 음악지도법등을 발표했다.

 

미국 유학 후인 1963년 교회음악 전문출판사인 교회음악사를 설립하고, 1964년부터 격월간 전문 음악잡지 교회와 음악을 창간했으며, ‘성가합창곡집시리즈를 출판했다. ‘(개편) 찬송가편집을 주도했고, 친구였던 장수철을 이어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지휘도 맡았다.

이후에는 오페라 작곡에 뛰어든다. 한양대 재직시 오페라 <에스더>1971년 작곡한 뒤 19724월 초연했다. 이후 4회에 걸쳐 재공연이 이뤄졌다. 이와 함께 다음 작품에 대한 갈증과 연구, 악한 권력자에 대한 심판 메시지에 신경을 곤두세운 독재정권과의 불편한 관계 등으로 인해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음악위원장을 마무리한 뒤 이민을 떠나게 된다.

 

그는 ’73년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까지 약 24년간 영락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했다. 잠시 미국에 체류하다 캐나다에 정착해 197711월 토론토한인연합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첫 사역을 시작했다. 198260세에 미주한인장로회 총회 캐나다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큰빛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7년 동안 시무하다 은퇴 2년을 남겨놓고 후계자에게 강단을 물려주고(교인수 어른 350) 고희가 넘었음에도 자신이 개척한 큰빛교회 성가대를 지휘하셨다.

 

그의 교회음악적 사고는 개방적이나 작품들은 대부분이 보수적인 경향으로 교회음악 개념을 하나님 찬양으로 보고 美學을 하나님 찬양을 위한 경건성으로 보고 있다.

9회 한국기독교학술상(아들이 대신 받음) 수상과 201110월에는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병마와 싸우며 말년까지 오페라 손양원함성 1919’를 만들었다.

 

지난 2013년 문성모 당시 서울장신대 총장이 <작곡가 박재훈 목사 이야기>로 정리해 놓은 책 감사의 말에서 그는 저를 이 땅에서 일하며 살아올 수 있도록 허락하시며 키워 주신 임마누엘 하나님은 제가 걸어온 어둡던 앞길을 비춰 주는 등불로, 또 지팡이로 인도하셨다그래서 철없는 제가 그 크신 은혜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며 험난한 길을 그저 달려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문 교수는 박재훈이 가장 싫어하던 것은, 교회음악은 예술적 가치가 없고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그는 교회음악이 세상 음악에 비해 평가절하 되는 것을 경계했다또한 개념 없는 교회음악을 싫어했다. 교회음악은 철학이 있어야 하고, 역사성에 기초해야 하고, 시대적 배경을 반영해야 하고,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에 독특한 시대적·역사적 배경이 저변에 깔려 있고, 그 작품을 통하여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전했다.

문성모 교수는 이에 대해 박재훈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작곡가로서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여 성공한 사람이라며 먹고살기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작곡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고, 하나님은 그의 성실함에 상급으로 갚아 주셨다고 평가했다.

박재훈 목사는 한국교회 음악의 방향에 대해 한국교회의 역사를 담아내야 한다. 역사의식을 갖고 창작하고 연주해야 한다.”우리 민족과 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은총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것을 찬양의 도구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한국의 교회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앙고백으로서의 찬양이 절실히 필요하다찬양이 무대음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막아야 한다. 예배음악으로서의 찬양의 정신이 살아나려면, 신앙고백적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 교회음악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고 있으며 한국교회 제1호 지휘자이었다. 하나님 절대주의자로 교회음악 작곡가 김두완(19262008)과 함께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진정한 교회음악가 이었다.